언론속의 무총인2012.08.28 12:25

 

 

 

[人+間 (인+간)] 한국 공수도 대부 정도모 40여 년간 대한공수도연맹을 지켜 온 정도모 회장이 다부진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아버지, 금이에요. 지환이가 다시 해냈어요.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금메달이에요."

작은아들 권홍이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저기서 달려온다. 나(대한공수도연맹 회장 정도모)도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 있을 수가 있나. 지금 여기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다. 이곳에서는 제11회 아시아공수도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다. 남자개인대련 60㎏급 이지환이 오늘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사정을 잘 아는 일본, 태국 등 다른 나라 협회 관계자들이 와서 축하를 해 줬다. "정 회장,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권홍 씨도 아버지 옆에서 정말 수고 많았어요. 이제 한국 공수도에도 활짝 봄꽃이 피겠네. 심판 보는 형 일홍 씨도 오라고 해요. 같이 기념 사진이라도 찍게. 이렇게 좋은 날 사진 한 장 안 찍으면 되겠나."
문득, 지난해 중국 취안저우에서 열린 제10회 대회 때 일이 떠오른다. 올해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눈물을 많이 흘렸다. 지난해에는 금을 두 개나 땄다. 올해보다 잘했는데 왜 울었을까? 대한공수도연맹을 만든 지 40여 년 만에 처음 아시아대회에서 우리 선수들이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아시안게임 등에서 늘 예선탈락만 도맡아 하던 우리가 금을 따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아버지, 이제 그만 우세요. 이렇게 기쁜 날 왜 눈물을 흘리고 그러세요. 남들이 다 보잖아요. 여기 중국까지 와서 우리 애들이 금메달을 땄는데 가서 축하인사를 해 줘야지, 여기서 이렇게 우시기만 하면 어떻게 해요?" 지난해 권홍이는 그렇게 말했었다.

대회 2연패를 이룬 지환이 손을 잡고 "잘했다"며 등을 두드려주다 보니 늘 설움만 받던 과거가 생각난다. 1969년 대한공수도연맹을 만든 뒤 매년 대한체육회 문지방을 넘나들었다. 체육회 가입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결론은 언제나 똑같았다. 반려. 체육회 가입을 거부당한 뒤 계단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삼키며 담배를 피우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이런 생각에 내 스스로가 불쌍했다. '참, 나도 답답한 사람이다. 그렇게 문을 두드려도 안 되면 일찌감치 포기해야지, 그게 뭐라고 죽어라고 매달리고 그러냐. 참, 네 인생이 비참하다.'

고개를 떨군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일부 직원들은 계단으로 찾아와 위로해주기도 했다. "엇! 정 회장 여기 계셨네. 미안해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우리도 이렇게 하는 게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지요. 가져오신 서류는 완벽해요. 규정대로만 하면 안 해 줄 이유가 없죠. 하지만 위에서 해 주지 말라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지.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늘 배척당하기만 하던 설움은 2001년에 끝이 났다. 그해 인정단체로 승인을 받아 대한체육회에 가입했던 것이다. 30년이 넘도록 공수도를 배척해 오던 대한체육회가 부산 아시안게임 때문에 할 수 없이 공수도연맹에 손을 내밀었다. 인정단체 승인 회의를 마치고 내려오던 계단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권홍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계단에서 흘린 눈물은 얼마나 됐을까?

공수도를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부터였다. 연세도 성함도 모르는 중국인 할아버지가 공수도를 가르쳤다. 매일 영주동 미군부대 옆 공터에서 혼자 운동을 하던 할아버지가 너무 대단해 보여 주변을 서성거렸더니 운동을 하게 해 주셨다. 그 자리가 지금은 코모도호텔로 바뀌었다. '꼬마야, 너 몇 살이니? 너도 운동 하고 싶니?' 아마 그분이 처음 하신 말씀이 그랬을 것이다. 중국말을 하셨으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에서 그런 이야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할아버지하고 매일 운동하는 게 참 좋았다. 한국전쟁이 막 끝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여섯 살 꼬마가 심심풀이로 할 수 있는 게 생겼으니 정말 재미있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공수도를 천직으로 삼게 됐을까. 세월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있었더니 어느새 그분과 비슷한 나이가 됐다.

초량에서 공수도장을 하던 이덕우 관장도 생각이 난다. 그분께 비로소 공수도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때 배운 실력이 내 평생을 먹여 살렸다. 당시는 아무 생각 없이 운동만 하고 참 좋았던 시절이었다.

피할 수 없는 천직이 공수도였던 모양이다. 겨우 나이가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던 경남공고 2학년 때 직접 공수도 체육관을 차렸으니 말이다. 그곳이 바로 부산 부곡동 기찰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어린 나이에 체육관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참 신기하다. 돈이 없어 시내에서는 체육관을 열지 못하고 친구 아버지 도움을 받아 4H구락부 회관 모퉁이에서 공수도를 가르쳤다. 겨우 나이 열여덞 살짜리가 체육관 관장이라며 큰소리치고 다녔으니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동네 영감님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깡패를 키운다"며 동네에서 쫓아내려고 아우성이었다. 할 수 없이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막걸리와 두부 몇 모를 사들고 가서 영감님들을 구워삶은 덕분에 겨우 체육관을 할 수 있었다.

운동을 같이했던 친구들 생각이 난다. 공수도를 함께하다 태권도로 돌아선 친구들. 이름을 밝히면 다들 처지가 곤란해지겠지. 다 이해한다. 그때는 모두 어려웠다. 태권도를 하지 않으면 대한체육회 가입을 안 시켜 준다니 할 수 없이 공수도를 버리고 태권도로 도장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나도 태권도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무도라는 게 남을 때리고 해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닌데 사람을 직접 가격하는 태권도는 무도 정신에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태권도로 전향했으면 지금쯤 대한태권도협회 원로가 됐을 텐데….

1969년 뜻이 같았던 사람 몇몇과 함께 대한공수도연맹을 만들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일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뀐 끝에 오늘날 이름을 갖게 됐다. 아시아공수도연맹(AKF)과 세계공수도연맹(WKF)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대한공수도연맹을 꾸리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한 해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이리저리 안 뛰어다닌 데가 없다. 명색이 국가대표라는 선수들을 데리고 국제대회에 나가면서 여비가 없어 선수들로부터 항공료를 걷어야 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작 대회에 가서는 제일 싼 숙소만 찾아다녀야 했다. 돈이 없어 현지 식당은 이용하지 못하고 늘 숙소에서 몰래 밥을 해 먹어야 했다.

 

정도모(왼쪽) 회장이 부산 동래구 안락동 중앙도장에서 아들 권홍 씨와 함께 훈련을 하면서 무더위를 잊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공수도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아이들도 공수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둘째 딸 미진이는 운동이 싫다고 끝까지 버텨 유일하게 공수도 가족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네 뒷산에 운동하러 가던 시절이 떠오른다. 큰딸 미경이와 큰아들 일홍이, 막내 권홍이까지 넷이서 항상 함께 운동을 했다. 미경이는 운동을 참 잘했다. 항상 국제대회에 아버지를 따라 다녔다. 그리고 대회 때마다 좋은 성적을 거뒀다. 문득 남편을 따라 베트남에 간 딸이 보고 싶다. 미경아, 잘 살지? 그곳에서도 운동 열심히 하고 있어? 일홍이도 선수 시절에 실력이 참 좋았다. 우리 공수도에 인재만 많았어도 일홍이가 일찌감치 은퇴를 해서 심판이 될 필요도 없었는데…. 그래도 지금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국제심판으로도 활약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기만 하다. 막내 권홍이는 혼자 용인에 올라가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면서 체육관을 운영하느라 힘들 텐데 언제나 웃는 표정이다. 

 

일홍아, 권홍아. 지금 내가 믿는 것은 너희 형제뿐이다. 아직 나이가 젊고 경험은 부족하지만 대신 패기와 추진력은 아버지가 봐도 대단하구나. 너희들에게 공수도를 가르친 것은 앞으로 한국 공수도를 이끌고 나가라는 뜻이라고 생각해 다오. 아버지가 불모지 한국에 뿌린 공수도 씨앗을 너희들이 잘 가꿔 예쁘고 맛있는 곡식으로 만들어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앞으로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너희들도 잘 알다시피 대한체육회에 가입은 했지만 공수도를 보는 눈은 30년 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 채택만 해도 그렇다. 공수도가 2004년에 전시종목이 됐는데 아직까지도 전시종목이다. 대한체육회에 가입하고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면서도 전국체육대회에는 끼지 못하는 스포츠는 공수도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 심지어 운동하는 사람들도 전혀 신경을 안 쓴다.

인천 아시안게임 해프닝도 대한민국 공수도의 아픈 현실이다. 인천시와 대한체육회가 대회를 유치할 때만 해도 공수도를 정식종목에 넣겠다고 했다가 뒤늦게 빼겠다고 하는 바람에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와 아시아공수도연맹이 발칵 뒤집혔지. 더군다나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도 그랬으니까. 부산시에서 처음에 대회를 유치할 때만 해도 공수도를 정식종목으로 넣었다가 대회를 유치하고 나니까 갑자기 공수도를 빼 버렸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시아공수도연맹에서도 항의에 항의를 거듭해서 겨우 대회 1년 전에야 공수도가 다시 정식종목이 될 수 있었다.

너희들하고 국제대회에 나가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정도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회장님, 한국은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약속을 안 지켜요?"라고 힐난할 때 우리 잘못이 아니면서도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권홍이는 분통을 터뜨렸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욕을 하면서도 그래도 내 열정만은 알아주더구나. 그 덕분에 동아시아공수도연맹 부회장, 아시아공수도연맹 부회장을 차례로 맡을 수 있었지.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공수도가 조금만 더 자리를 확고하게 잡았다면 아시아연맹 회장도 벌써 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일홍아, 권홍아. 나는 내년 9월을 무척 기다린다. 그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2016년 올림픽 프로그램 선정 투표가 실시된다. 공수도가 과거 두 번이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기대가 크다. 올림픽 종목만 되면 공수도가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이 되고, 그렇게 되면 실업팀도 생기고 선수도 늘어나리라 믿는다. 

2019년이면 대한공수도연맹 창설 50주년이 되는구나. 그때쯤이면 공수도도 더 이상 억압받지 않고 우리나라 체육의 한 주역으로 떳떳이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겠지? 50주년 창립 기념식 때 내가 미경이, 일홍이, 권홍이랑 함께 모여 옛날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면서 껄껄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부산일보)

약력

1944년경남 하동 출생

1962년공수도장 개관

1969년대한공수도연맹 창립

1992년세계공수도연맹 가입

2005년코리아오픈 공수도대회 창설

2008년 7월아시아유소년국제대회 단장

2009년 2월대한체육회 감사

2010년 8월동아시아공수도연맹 부회장

2011년 7월아시아공수도연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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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국 soma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