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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검무보존회

최수운의 용담검무(龍潭劍舞) 속에 숨은 동학(東學)

무예가 무술로서의 의미보다 종교적 의례용이나 무용이라는 예술로 승화된 극단적인 예가 용담검무이다. 용담검무는 동학-천도교의 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 선생이 만든 검무(劍舞)이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 속에 민족과 민족혼을 지키고자 동학을 창도한 수운 선생은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점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서 전북 남원 은적암에 피신해 있을 때에 용담검무를 신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충의를 다지게 하였다. 용담검무는 이에 앞서 수운 선생이 경주의 용담에 있을 때부터 즐겨 추던 칼춤으로 남원에서 검결이 덧붙여진다.


용담검무를 시연하는 모습.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수운은 관헌에 쫓겨 은적암(隱寂菴)에서 은거하는 동안 검무에다 검결(劍訣)을 지어 미래를 대비하였다. 검의 노래인 검결은 동학의 이념과 정신을 새겨 넣음으로써 동학 도인들이 비밀결사하고 결속을 다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할 요량이었다.

수운은 말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거진 이루었다. 무엇이 두려우랴.” 검결이 처음 지어진 시기는 수운 선생이 동학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펴기 바로 전인 경신년(庚申年·1860)으로 추정된다. 용담검무가 종교적인 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수운 선생이 본격적으로 동학을 세상에 펴기 시작한 신유년(辛酉年·1861) 4월 이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한양대 윤석산 교수 도움).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패지 시호로다(때로다, 때로다, 이내 때로다. 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수만년에 날까말까, 남아장부 오만년의 운수로다)/ 용천검 드는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 넓은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디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수운은 바로 이 검결 때문에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도를 그릇되게 하고 바름을 어지럽게 하는 법률)이라는 죄목에 걸려 참형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검결은 미래에 닥칠 어려움에 대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수운 선생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張本)이다. 짧은 검결 속에는 혁명의 의지가 요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운명과 흥망을 가를 정기가 숨어 있었던 셈이다. 갑오농민전쟁 때 이 검결은 군가로 불리기도 했다.

구한말을 전후하여 생긴 민족종교 가운데 종교의 원리나 경전의 체계로 볼 때 새 시대를 이끌어가기에 손색이 없었던 것은 동학(東學)이었다. 그래서 동학은 음으로 양으로 그 후 3·1운동과 더불어 발생한 신흥종교의 모태가 되었다.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운동을 주도한 동학천도교 세력들은 일제의 탄압 대상이 되어 교세가 줄어든 반면, 이를 바탕한 다른 민족종교들이 일어났다.

용담검무의 시연 중 회전하며 공중을 나는 모습.
지구촌이 하나가 된 지금, 종교나 사상에서 순수 한국의 것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은 동학뿐이다. 그러한 동학이 일제에 의해 정확히 경술국치를 반백년 앞두고 마치 민족의 생존본능처럼 자생하여 나왔다. 집단은 항상 위기 때에 정신적, 물질적 요구에 대응한다. 새로운 종교를 창도(創道)하는 것은 개국(開國)에 버금가는 대역사이다. 아니 인류의 보편성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어렵다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동학연구에서 검무는 소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운 선생의 무인정신이 어떻게 창도에 이르게 하였는지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 수운 선생은 나약한 문인이 아니라 강직한 무골을 타고났기 때문에 동학이라는 민족종교를 창도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개인에게 문무겸전이 이상이라면 나라에는 문무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인류문명의 대원칙을 무시한 조선은 결국 나라를 잃고 만다. 수운 선생은 경술국치(1910년)가 발생하기 50년 전(1860년)에 이미 이를 예측하고, 외세에 대항하여 나라를 되찾을 민족정신과 혼을 담을 그릇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동학이다. 특히 동학은 당시에 이미 시대를 이끌고 있는 서학에 맞서면서도 서학을 포용하는 동서문화의 통합과 문화의 확대 재생산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정신사와 사상사의 일대 쾌거였다.

수운 선생이 이렇게 신흥종교의 교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 자신을 문무겸전의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학의 검결(劍訣)과 검무(劍舞)는 ‘동경대전(東經大全)’ 등 경전과 달리 따라서 몸으로 직접 실천하는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무겸전을 말하는 것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문(文)에 경(經)이 있다면 무(武)에도 경(勁)이 있다.”

인문학의 집대성이 경전(經典)이라면 무학의 결집은 바로 뼈와 근육 사이의 경력(勁力)를 키우는 데 있음을 말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

“무(武)는 무(舞)이다.”

춤이 먼저인지, 무술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둘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무술은 흔히 검무(劍舞), 즉 칼춤으로 선보이기도 한다. 무술을 조금 부드럽게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면 춤이 되고, 춤 속에는 무술의 동작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무술의 투로(套路)와 춤의 무보(舞譜)는 통하는 점이 많다. 둘은 같은 데서 출발하였다가 점차 필요에 의해서 달리 발전하였을 수도 있다.

수운 선생은 경학과 무학, 그리고 이것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는 경지에 있었던 것 같다. 통상 검의 세를 은밀하게 말하는 것이 검결이지만, 수운 선생의 검결은 그러한 세와 동작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 한 시대를 열어가는 선각자의 종교적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수운 선생의 칼춤은 무술의 기술이기 전에 기운생동을 받아서 그것을 칼춤으로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무술이 고도로 수련 되어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는 다른 일종의 신칼인 셈이다. 그래서 종교적, 의례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신과 인간과 칼, 이 삼자가 하나가 되어 공간에서 기운이 넘치는 율동으로 나타난다.
◇수운 선생이 남원에서 피신하였던 은적암터.

수운 선생이 동학을 완성하는 데는 조선조 성리학의 학맥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근암(近菴) 최옥(崔+沃밑에金·1762∼1840)은 바로 퇴계학의 주맥에 속하는 대유(大儒)였다. 수운은 영남 유림의 종착지였던 셈이다. 그런데 수운 선생은 어머니가 과부의 몸으로 근암공에 후처로 들어온 몸이 되어서 적자 대접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 한씨(韓氏) 부인은 근암공의 둘째 부인이 병사한 뒤, 세 번째 부인으로 들어왔었다. 근암공이 수운 선생을 낳았을 때는 63세였다. 이미 아버지는 조카를 양자로 들였고, 다시 수운의 조카가 태어나 있었던 상황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수운 선생의 시대적 혁명아로서의 성격이 배태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허균의 입장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수운 선생은 당시 새 세상을 위해서는 유교나 불교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내 동학은 결코 유교와 대치되지 않는다”고 했으며 유교와 연속성을 보인 점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관에서는 수운을 대역죄인, 역모의 괴수로 간주했다. 수운의 시대적 앞서감이 유림에게는 서학의 일당으로 비쳐진 때문이었다.

영남 유림은 퇴계를 정점으로 둘로 갈라지는데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이 그들이다. 근암공은 학봉 김성일 쪽에 속한다. 학봉의 학문을 이은 사람이 경당 장흥효이며, 그 맥은 경당의 외손 갈암 이현일,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 밀암의 외손 대산 이상정, 대산에서 기와 이상원, 그리고 그 기와의 제자가 바로 수운의 아버지인 근암 최옥이다. 최옥은 노계 박인로의 문집을 만들 때에 참가할 정도의 당시 영남을 대표적인 학자였다.

수운 선생의 아버지 최옥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거유였던 셈이다. 최옥은 아들 수운이 17살이 될 때까지 오로지 공부만을 시켰다. 그만큼 기대를 모을 동량으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대는 근대로 넘어가고 있었고, 열강의 침략 속에 분열과 당파에 빠져 있었던 조선은 그를 조용한 학자가 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의 공부가 반체제 혁명가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반(反)을 통한 발전은 그에게서 빛을 보게 된다. 수운은 공부는 하였지만 재가녀의 신분으로 인해 과거를 볼 수 없었다.

신분제의 불합리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승화되어 나온 것이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시대적 정명(正命)이었다. 그는 유학자답게 동학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을 성리학을 중심으로 구성하면서 재래의 전통을 포용했다. 
수운 선생이 공부를 파고 검무를 펼쳤던 경주의 용담.

수운 선생의 검무는 제의의 의식용과 실제 전투용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다. 수운은 천제를 지내거나 다른 종교의식 후에 검무를 추었으며 동시에 강설의 자리에서도 보여줌으로써 미래에 닥칠 유사시 혁명에 필요한 무사로서의 자질을 갖추도록 독려하였다. 수운에게 칼은 신과 통하는 매개였으며, 자신을 신과 하나가 되게 하는 상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운의 칼은 하늘과 통하는 고대의 신성성을 회복하는 기운이 흐르는 징표였다.

무예라는 것이 때로는 종교, 정치 등을 뒤바꾸는 혁명의 수단과 상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무는 권력의 상징이다. 이는 인간의 삶이 크게 문(文)과 무(武)로 구성된 때문이다.

수운 선생은 무인이 개국을 하듯이 창교를 하였다. 수운 선생에게는 학자로서의 면모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골의 면면이 강하게 풍긴다. 6대조 최진립(崔震立)은 병자호란 때 협천 땅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었으며,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수운은 틈이 나면 칼춤을 추면서 의지를 다졌다. 그는 특히 관헌에 몰리면서 남원 은적사에 머물 때 밤마다 칼춤으로 뜻을 더욱 확고히 했다. 주의할 것은 용담검무는 목검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용담검무가 여타의 다른 검무들과는 다르게 ‘목검(木劒)’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 제국에 대한 서양의 침공으로부터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쇠로 된 진검(眞劍)으로 검무를 추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목검’을 가지고 춤을 추었는가. ‘목(木)’은 곧 ‘동(東)’을 의미하고 있다. 진검을 이루는 ‘쇠’는 ‘금(金)’으로 곧 ‘서(西)’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서양을 뜻하는 쇠로 된 ‘진검(眞劍)’이 아닌, 동방을 뜻하는 ‘목검(木劒)’을 사용하는 검무, 곧 용담검무를 추며 수운 선생은 서양을 물리치고자 염원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윤석산 교수 도움)

용담검무를 복원한 장요선(張孝善)씨는 그의 고조부가 수운 선생이 남원 은적사에 은거할 때 집단적으로 입교를 한 흥덕(興德) 장씨의 아랫대이다. 장씨는 그의 증조부 대에 남원에서 임실로 이사 왔고, 임실에서 다시 조부 대에 담양으로 이사했다. 조부인 장대성(張大成)씨는 오수, 임실, 담양 일대의 이름난 목수였다. 조부는 목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장영철(張永喆)씨는 마을의 선소리꾼으로 초상이 나면 구슬픈 소리로 망자와 유족들을 달랬다. 아버지는 선소리에 이어 마지막에는 꼭 칼춤을 한바탕 추면서 장제(葬祭)의 끝을 장식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칼춤을 추는 것을 보았어요. 그것이 자신도 모르게 제 몸에 입력되었던지 그 후 칼춤을 추는 것을 좋아하고, 연구하게 되었어요.”

그는 어릴 적에 아버지의 검무를 보고 흉내 내며 자랐다. 그래서 무보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칼을 들고 자세를 취하거나 칼춤을 춰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에 저절로 동작이 나온다. 그래서 그가 처음에 만들어낸 투로는 모두 27개 동작이었다. 물론 이 용담검무는 복원과 창작이 반반인 셈이다. 현재 105개의 연속동작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용담검무를 추는 인연으로 천도교에 입교(1990년)하였으며, 그 후 더욱 수운 선생의 한울정신을 사모하게 되었고, 선생의 기운이 자신에게 내리는 것을 경험한다. 그의 입교 과정도 예사롭지 않다. 천도교 교령이었으며 현재 용담검무보존회장 직을 맡고 있는 김광욱(金光旭) 선생이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감악산의 도사 이진봉(李璡奉) 선생으로부터 그를 소개받았고, 둘은 만나자마자 그때부터 용담검무 복원이 거론되었으며, 그것이 입교로 이어졌다. 그동안 복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어떤 때 춤을 추다 보면 제가 수운 선생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도 많습니다. 용담정에 들러서 검결을 해석할 때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으며, 이렇게 검무를 추는 것이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검무를 추면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검무의 복원을 위해서 더욱 수련을 하고, 무보를 만들어갈 때는 수운 선생의 꿈을 꾼 것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물론 용담검무의 복원에는 자료의 빈곤으로 한계가 있었으며, 수운 선생에게 연기(緣起)를 대고, 수운 선생의 인내천 정신을 이어가는 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노력에 하늘이 감동했던지, 용담검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부산물로 자신의 검술인 ‘검예도(劍藝道)’를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다. 결국 그는 복원무술로 용담검무를 재연하였으며, 창시 무술로 검예도를 가진 셈이다.

그의 검예도는 우아일기(宇我一氣), 우아일여(宇我一如), 무념무상(無念無想), 검선일치(劍禪一致) 등을 통해 정심수기(正心修己)를 달성하고, ‘검사(劍士)의 도(道)’를 이루고, 검예진천년(劍藝道天年)을 이루는 것이 목표이다. 그는 내심 수운 선생의 검무가 시대를 잘못 만나 못 다한 것을 검예도가 완성한다는 포부가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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