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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상식

차력과 차력술

차력은 '영적 집중'으로 내공수련의 하나

인간읜 능력은 어느 정도일까? 한때 무예의 세계에서 단골시범으로 등장하는 차력(借力)은 사회적 비판으로 수십년간 외면되어 왔다. 나이트클럽이나 행사장에서 눈요기 거리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 체계화한다거나 정립하는 과정도 없었다. 이에 필자는 차력의 세계와 관련련한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살펴보았다.

 


내공의 표출방식 차력술(사진은 격파장면)
차력은 사전적 용어로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spiritual concentration'이라고 해 '영적 집중'으로도 표현한다. 이러한 차력의 본 의미가 있음에도,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마술쇼와 같은 것 아니냐는 편견으로 바라본다.

차력의 사회적 인식은 1970년대 '차력술'이라고 해 외적인 능력표현으로 흥행된데서 출발한다. 그 이전에도 차력의 수련법은 있었지만, 1970년대 차력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예인들이 하나둘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알려졌다. 이 시기 무예계는 해방이후 대한체육회에 유도, 검도, 태권도가 가맹되면서 나머지 무예들은 외면당하던 때이다. 이런 와중에 제도권이외의 무예들이 전통무예의 비기(秘技)와 '안보무술'이라는 이름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차력술은 국민들로 하여금 무예의 신비감을 보여주는 계기를 불러왔다.

1970년대 초, 현재 대한유술협회 장만철회장이 29세때 당시 대한차력운영회 소속으로 공중비행검술로 인기를 모았고, 어린이날 단골시범을 보인 무궁화차력단의 박성권, 그리고 과학기술처에 근무하고 있던 최동섭이 1974년에 종로구에 차력무술도장을 개관하기도 했다. 1975년 당시 감사원 동홍욱 총장도 맨손으로 못을 박는 차력의 보유자였다. 이런 차력의 흥행으로 차력영화 시리즈가 기획되는 등 차력의 세계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인기였다.


80년대 약장수, 불법시술 등 부정적 인식 강해 외면

 


1982년 불법시술관련 기사(경향신문)
차력의 흥행은 1970년대 종합무술대회가 개최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신선한 볼거리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붉게 탄 쇳덩이를 맨손으로 마음대로 주무르는 화공술, 차돌을 맨손으로 도끼질하듯 다듬는 파격술 등은 당시 현대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괴력(?)으로 당시 관람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MBC의 <묘기대행진>에서 매번 등장하는 차력사들의 차력술은 시청자들에게 최고의 볼거리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77년에는 내, 외공술과 기공술을 통합해 '충무무술'이 창시되기도 했다. 하나의 체계적인 무술로 발전해 보겠다는 의지였다. 단칼에 밀감 조각내기, 인체를 무기로 삼는 내공, 검과 봉을 사용하는 외공, 천지수인력(天地水人力)을 합하여 큰 힘을 내는 기공의 기법을 통일한 것이다. 이러한 충무무술은 1975년부터 차력과 타격술이 통합 발족되면서 기공술을 연마한 최대길(당시 40세)과 내외공술의 홍광주(당시 35세)가 그 주인공이다. 최대길은 20세전후로 5년간 계룡산에서 수도했고 차력술을 배워 자동차 넘기기, 트럭 버스를 맨손으로 끌기 등의 특기를 지니며 남한산성에서 제자를 육성해 왔다. 또, 홍광주는 주먹으로 벽돌 7장깨기 등 타격술에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력의 세계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약장수들이 차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약을 판다는 사회적인 비판이 뒤따랐다. 결국 수많은 약장수들이 입건됐고 차력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받게 됐다. 특히 1981년 MBC뉴스센터에서는 '신비로운 차력의 세계'라는 주제로 심층취재보도되면서 차력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2주일간의 집중취재를 통해 차력수련에 정진하고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약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사기성이 농후한 차력사들에 대한 비판이 첫 보도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이 뒤따르자 일부 무술인들이 도장을 차리면서 또한번 차력은 사회적 외면을 받게 됐다. 1980년대 초반 불법의료시술행위로 전국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 차력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일이 일어났다. 아들·딸 낳는 법, 임신조절이라든가, 요통·디스크치료 시술 등으로 도장이 아닌 불법 시술소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신은 순수한 차력사들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차력은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차력의 체계화, 연구필요

사회적으로 사기성 흥행이라는 비판 때문에, 차력무술인들은 새로운 무예이름으로 변신을 하였다. 90년대 부터 '기공'과 관련된 이름으로 변했다. 대표적으로 현재 대한유술협회 장만철 회장이 이끌었던 기공무술협회와 한국건신기공협회 오동석회장이 이끈 차력무술협회가 있다. 외공으로 볼 수 있었던 차력술이 본래 차력의 수련체계인 내공위주의 수련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렇게 잠들어 있던 차력술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지난 11월 29일 김포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제3회 전국무전에서 장만철회장은 대한유술협회 경기종목에 차력술로 차력을 평가하는 경기방식을 선보였다. 이러한 경기방식은 내공의 기능을 외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른 무예와 차별화한 경기를 보여주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이 경기에 대한 평가는 분분했다.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입장에서는 70년대와 80년대 약장수나 불법 시술자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인식을 극복하고 차력의 세계를 다시 보었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아직도 ‘보여 주기식 시범같다’는 자칫 속임수로 보일 수 있다는 평가였다. 'show'에 치우칠 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

무예의 스포츠화는 각 무예들이 지닌 어쩔수 없는 사회적인 선택이었다. 최근 무예는 본질적인 구조인 내공과 외공의 수련체계와 스포츠에 대한 경계가 점점 뚜렷이 구분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무예와 스포츠는 차별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간의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를 기존 스포츠화된 무술들은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경기방식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다.

사라져 가는 차력과 차력술은 분명히 우리 현대 무예사에서 큰 영역을 차지했다.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체계화가 필요하다. 일부 차력 원로들과 젊은 차력인들의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아울러 학계에서도 차력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무카스 Tip] 차력과 차력술

본고에서 차력(借力)은 내공의 능력으로, 차력술(借力術)은 내공의 기능을 외공으로 표출하는 방식으로 구분했다. 또 한번 강조하면 사전적의미로 차력이라 함은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는 것이고, 차력술은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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