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력은 '영적 집중'으로 내공수련의 하나
차력의 사회적 인식은 1970년대 '차력술'이라고 해 외적인 능력표현으로 흥행된데서 출발한다. 그 이전에도 차력의 수련법은 있었지만, 1970년대 차력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예인들이 하나둘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알려졌다. 이 시기 무예계는 해방이후 대한체육회에 유도, 검도, 태권도가 가맹되면서 나머지 무예들은 외면당하던 때이다. 이런 와중에 제도권이외의 무예들이 전통무예의 비기(秘技)와 '안보무술'이라는 이름으로 융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차력술은 국민들로 하여금 무예의 신비감을 보여주는 계기를 불러왔다. 1970년대 초, 현재 대한유술협회 장만철회장이 29세때 당시 대한차력운영회 소속으로 공중비행검술로 인기를 모았고, 어린이날 단골시범을 보인 무궁화차력단의 박성권, 그리고 과학기술처에 근무하고 있던 최동섭이 1974년에 종로구에 차력무술도장을 개관하기도 했다. 1975년 당시 감사원 동홍욱 총장도 맨손으로 못을 박는 차력의 보유자였다. 이런 차력의 흥행으로 차력영화 시리즈가 기획되는 등 차력의 세계는 당시 사회적으로 큰 인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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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약장수, 불법시술 등 부정적 인식 강해 외면
이러한 과정에서 1977년에는 내, 외공술과 기공술을 통합해 '충무무술'이 창시되기도 했다. 하나의 체계적인 무술로 발전해 보겠다는 의지였다. 단칼에 밀감 조각내기, 인체를 무기로 삼는 내공, 검과 봉을 사용하는 외공, 천지수인력(天地水人力)을 합하여 큰 힘을 내는 기공의 기법을 통일한 것이다. 이러한 충무무술은 1975년부터 차력과 타격술이 통합 발족되면서 기공술을 연마한 최대길(당시 40세)과 내외공술의 홍광주(당시 35세)가 그 주인공이다. 최대길은 20세전후로 5년간 계룡산에서 수도했고 차력술을 배워 자동차 넘기기, 트럭 버스를 맨손으로 끌기 등의 특기를 지니며 남한산성에서 제자를 육성해 왔다. 또, 홍광주는 주먹으로 벽돌 7장깨기 등 타격술에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력의 세계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도심의 약장수들이 차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약을 판다는 사회적인 비판이 뒤따랐다. 결국 수많은 약장수들이 입건됐고 차력의 이미지는 큰 타격을 받게 됐다. 특히 1981년 MBC뉴스센터에서는 '신비로운 차력의 세계'라는 주제로 심층취재보도되면서 차력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2주일간의 집중취재를 통해 차력수련에 정진하고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약을 팔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는 사기성이 농후한 차력사들에 대한 비판이 첫 보도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이 뒤따르자 일부 무술인들이 도장을 차리면서 또한번 차력은 사회적 외면을 받게 됐다. 1980년대 초반 불법의료시술행위로 전국의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 차력 관계자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일이 일어났다. 아들·딸 낳는 법, 임신조절이라든가, 요통·디스크치료 시술 등으로 도장이 아닌 불법 시술소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신은 순수한 차력사들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차력은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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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력의 체계화, 연구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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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카스 Tip] 차력과 차력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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